ㅎㄹㅇㄷㅂㅍㄷㅅㅈ_72.7*72.7 MIXED MEDIA ON CANVAS 2020
TABLE #2
1990년 태어난, 2021년 다시 태어난
백향목 작가의 작가노트에 꾸준히 등장하는 건 1990년이다. 그의 삶이, 일상이 시작된 해. 하지만 그는 대학 시절 수업 시간에 들은 ‘1990년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없다’는 말에 무척 서운함을 느꼈다고 했다. 1990년에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독일의 통일 외에는) 없었다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라도 중요하고 기쁜, 때로는 아픈 시간이 아니었을까. 백향목의 작품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변색되는 기억, 지나가버리는 시간들을 그렇게 캔버스에 켜켜이 쌓고, 그 작업은 예측하지 못한 형태와 색채의 조합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작품의 주요한 주제인 일상을 관찰하는 방식도 궁금해요. 노트에 기록을 하거나 카메라에 담거나 혹은 다른 방식이 있나요?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거나 관찰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어떤 순간이나 경험의 잔상을 컬러로 기억하는 편이에요. 팬데믹 이전에는 항상 1년에 두 번 정도 해외여행을 갔는데, 그 중에 하와이는 필수 여행지였죠. 보통 작품을 시작할 때 떠오르는 컬러칩을 먼저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데, 저도 모르게 여행지 등에서 느꼈던 강렬한 색감이나 잔상을 작품에 많이 드러난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난 해부터 만든 작품은 제가 봐도 조금 칙칙하더라고요(웃음). 원래 블랙 컬러도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블랙도 생각보다 많고요. 우울한 이미지를 표현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우울한 느낌이 들고요. 그래서 지금은 우울한 기분이 들면 붓을 들지 않으려고 해요.
작품의 방식은 마치 다양한 재료를 섞은 콜라주처럼 얽혀 있어요, 자세히 보면 컬러의 레이어가 보이기도 하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강렬한 색채 표현이 늘 인상적이고요.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나가나요?
색을 칠하고 지우고, 또 칠하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해요. 저에게 이런 과정은 기억과 시간을 의미해요.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컬러를 덮는 과정이 일종의 기억의 단편을 쌓는 거죠. 어떤 컬러는 보이게 하고 어떤 컬러는 완전히 안보이게 만들고요.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컬러 조합이나 형태가 보이고, 거기에서 또 확장을 시켜요. 예전에는 컬러의 레이어를 강조하고자 전에 칠한 컬러의 라인이라도 보이도록 했는데, 이제는 가려지는 부분은 완전히 안보이게 덧칠해요. 그 덮는 행위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작품 속 인물의 표정도 눈여겨보게 돼요. 즐거움이나, 화, 슬픔 등의 감정이 얼굴 표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죠. 대부분 무표정을 짓습니다. 무표정의 사람들에 작가는 어떤 특별한 의도를 담아내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소재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작가님만의 뉘앙스 같고요.
지난해 7월에 열었던 <이매진 유토피아> 전시까지만도 해도 인물에 입을 안 그렸어요. 표정을 읽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작품에 일상에서 느끼는 단상과 경험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입이 없는 인물들이 좀 무섭다는 얘기가 있어서(웃음), 좀 더 확실하게 무표정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제는 입을 그리는 대신 눈에 더 신경을 써요. 입이 웃고 있든 아니든, 눈에는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하죠.
작품 속에서 재미있는 요소 중에는 텍스트도 있어요. 노래 가사 일부를 자음으로 표현해 마치 수수께끼처럼 메시지를 해석하도록 만들거나, 글자 자체를 거꾸로 표기해 이리저리 살펴보게 만들어요.
일부러 한 번에 읽히지 않도록 의도해요. 이 또한 시간을 의미하고요. 앞뒤 순서도 모호하죠. 그러다 보면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처음에는 영어를 텍스트로 사용했는데, 한글을 텍스트로 사용하면서는 자음만 쓰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해 봤고요.
작품 속 오브제 또한 각각 상징이나 은유가 있어요. <이매진 유토피아>에서도 뱀이나 선악과, 흑표범 등 흥미로운 모티브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이매진 유토피아>는 팬데믹으로 인해 달라진 우리의 일상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전시였어요. 작업을 시작했을 때 ‘에덴동산’과 ‘정글북’을 모티브로 삼았죠. ‘정글북’ 속의 흑표범은 모글리를 살려주는 존재인데, 그래도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선악과는 먹는 행위보다 과일을 따는 행위에 더 의미를 두었어요. 그건 어떤 선택의 순간이고,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니까요. 뱀은 일종의 현혹의 의미예요. 나쁜 존재로 묘사되지만 잠깐의 현혹으로 기분이 나아진다면 크게 나쁜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주로 막힘없이 진행되는 편인가요?
경우에 따라 달라요. 작업 기간은 보통 일 주일 정도, 작품 사이즈가 큰 경우는 2~3달 정도 소요되는데, 한 작품의 진전이 더디면 1~2주는 아예 작업이 안될 때도 있어요. 막힐 때는 아예 다시 캔버스를 컬러로 전부 덮어 버리기도 해요.
새롭게 컬러를 덮은 후에는 어떻게 하세요?
제 성향상 한 작품이 완전히 마무리가 되어야 다른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가 막히면 난감하죠. 그럴 때에도 일단 색을 칠해요. 습작용 캔버스에 컬러 블록을 쌓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생각만 하기보다는 일단 손에 붓을 들고 그리는 편이 나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뭔가 만들어지죠. 완성이 되면 캔버스를 뒤집어 안보이게 해놓고요. 작품에 완벽한 완성이란 없으니까, 보면 자꾸 덧칠할 것 같거든요(웃음).
커스텀멜로우에서도 작품의 독특하고 아름다움 색채감에 매료되어 협업을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협업 제안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너무 신기했어요. 스무 살 때 백화점에서 커스텀멜로우의 레인코트를 보고 완전히 반했던 적이 있어요. 안감의 컬러와 패턴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처음 ‘내돈내산’으로 구매한 옷도 커스텀멜로우였고요. 지금은 좀 작아져서 못입지만 그 때 구매한 모직 소재의 카키 컬러 재킷은 아직도 갖고 있어요. 20대 때의 저에게는 커스텀멜로우 재킷이 선물이었다면, 30대에 들어선 지금의 저에게는 이번 협업이 선물 같아요. 평소 좋아하는 패션, 그것도 좋아하는 브랜드의 협업 제안이어서 더욱 설렜고요.
이번 협업 컬렉션에는 뱀, 표범, 해골, 사람 등이 담긴 작품이 주요 모티브로 전개되었습니다. 협업 과정은 어땠나요?
커스텀멜로우에 제 작품과 스토리를 전달했고, 커스텀멜로우 측에서 그중 8개의 작품을 골랐어요. 협업 컬렉션은 셔츠와 모자, 양말을 비롯해 트레이와 아트 포스터까지 다양해요. 사실 처음에는 좀 걱정도 했어요. 커스텀멜로우의 이미지에 잘 맞는 작품을 만드는 편이 더 수월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죠. 제 작품이 셔츠에 프린트 되었을 때나 입었을 때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고요. 그런데 브랜드 측에서 너무 센스 있게 작품을 활용해 주셨어요. 그림의 모티브를 일부 활용하거나 텍스트만 따로 떼어서 소매의 디테일로 붙이기도 하고, 일부 요소는 자수나 패치를 사용해 다른 질감으로 표현하기도 했고요. 그림을 등쪽에 붙이는 방식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신선했어요. 제가 오버사이즈의 옷을 즐겨 입는데 이번 컬렉션이 오버사이즈로 출시되어서 더욱 마음에 들고요. 작품에서 모음을 활용하듯, 협업 컬렉션만의 로고도 디자인했어요. 요즘은 집과 작업실을 오가다가 커스텀멜로우 매장에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래요. 괜히 뿌듯하더라고요(웃음).
커스텀멜로우는 젊고 감각적이며 자유분방한 브랜드의 이미지가 작가님이나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고 해요. 작가님 역시 커스텀멜로우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고요. 작가님이 보는 ‘커스텀멜로우’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20대 때는 제가 입고 싶은 스타일이 그대로 커스텀멜로우의 컬렉션이었어요. 커스텀멜로우는 젊고 건강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호불호가 별로 없는 남친룩 스타일의 정석 같고요. 우리나라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시도해보고 싶은 스타일이랄까?
평소 작가님의 SNS에도 드러나듯, 스스로 감각적인 패션 스타일을 갖고 있어요.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정의하자면 혹은 추구하는 패션 스타일이 있다면요?
데님류를 매치하는 스타일을 좋아해요. 모자나 신발에도 관심이 많죠. 쇼핑을 한창 하던 때에는 같은 옷을 (구매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여러 번 산 적도 있어요. 요즘은 옷을 구매해도 입을 일이 별로 없어서 집에 차곡차곡 쌓여 있지만요. 겨자색 같은 밝고 따뜻한 컬러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집과 작업실만 오가서인지 스타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돼요. 거의 화이트나 블랙 등의 무채색만 입네요.
BAGHEERA_162.2*112.1 MIXED MEDIA ON WOOD 2020
ANACONDA_MIXED MEDIA ON WOOD 45.5*37.9CM 2020
LOVE ONLY_MIXED MEDIA ON WOOD 116.8*91.0 2020
지금 작업실을 둘러보니 새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눈에 띄네요.
최근에 만들고 있는 작품의 주요 모티브예요. 이 또한 경험에서 얻은 소재고요. 코로나가 심해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죠. 그때 밖에 참새떼가 나무에서 후두둑 날아가는 장면을 봤어요. 참새떼들이 자유롭게 외출을 누리던 시절의 우리들 같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 작품에 대해 관심 갖는 컬렉터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요. 아트부산2020 에서도 모든 출품작이 완판 되었죠. 사람들이 작가님 작품을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저도 굉장히 궁금했는데,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컬러에요. 제 작품의 컬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시죠.
SNOW WHITE_MIXED MEDIA ON CANVAS 45.5*37.9 2020
LIAR_MIXED MEDIA ON WOOD 145.5*112.1
이번 협업에서도 작가님 특유의 강렬한 색채 대비감과 위트가 인상적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에디션이 있나요?
모두 마음에 드는데 굳이 꼽자면 ‘스노우 화이트’ 에디션과 ‘라이어’ 에디션이요. 작품의 배경 컬러를 메인 컬러로 활용한 점이 재미있었어요. ‘러브 온리’ 에디션도 좋고요.
사람들이 이 에디션을 어떻게 즐기고 경험하기를 바라나요?
협업 컬렉션을 입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보여주고 싶었던 각각의 오브제를 옷으로 옮긴 컬렉션이어서 제가 표현한 이런 위트와 즐거움을 입어주는 느낌이기를 바래요. 재미있는 친구의 그림을 함께 읽고 느끼는 경험이었으면 해요.
2021년은 작가님께 어떤 해가 될까요?
지난 해에 개인전을 두 차례 하고 아트부산 2020 등에도 참여했고, 12월 즈음에 커스텀멜로우와의 협업 제안도 받는 등, 저에게는 유의미한 사건들이 많았죠. 올해는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발판의 해가 될 것 같아요. 해외 전시 두 건이 예정되어 있거든요. 7월에 영국 비어스 런던BEERS LONDON에서 <잊혀진 것들을 위하여 건배>(가제)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어요. 제가 언젠가 꼭 전시를 해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그곳의 전속 작가가 되었죠. 이어서 10월에는 LA에 위치한 OTI 갤러리OVER THE INFLUENCE GALLERY에서도 전시 예정이고요. 비어스 런던에서의 전시는 저의 사춘기 시절부터 경험한 일들을 중심으로 ‘즐거웠지만 잊혔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고요, OTI갤러리에서의 전시는 ‘트로피컬’을 주제로 밝고 활기찬 일상의 면모를 보여줄 생각이에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때처럼요. 그것이 제가 지금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또 바라는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